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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들

보이는 어둠 (윌리엄 스타이런, 문학동네)

by 난나니 2019. 1. 2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은이), 임옥희 (옮긴이)  문학동네  2002-09-02  원제 : Darkness Visible (1990년)

 

우울할 때 경험하는 감정, 생각, 신체 및 인지 반응 등에 대해 상당히 섬세하게 기술해놓은 책. 역시 소설가는 다르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그마저도 우울증에 대해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듯 우울감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 통감한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공허감에 대한 묘사가 없었던 것. 인생을 통틀어 공허감은 언제나 나의 핵심 감정이었는데 이 책에서 만나지 못한게 아쉽다.  

공허감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다룬 책들을 보면 상당히 잘 묘사되어 있으므로 어서 조만간 일독을 끝내기로.

 

 

육체적 심리적 자기 혐오-뭐라고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자부심의 상실 같은-는 우울증의 가장 보편적인 증세였다. (p.9)

 

우울증은 기분의 혼란 상태인데, 불가사의한 고통을 안겨주고, 냉철한 판단력을 갖춘 지성도 도저히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애매한 증상이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게 된다. 일상적인 혼란쯤으로 여기는 가벼운 침울함이나 '기분 저하(the blues)'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그것이 치명적인 질병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p.11-12)

 

심각한 우울증은 쉽사리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14)

 

내 머리는 익숙한 발작 상태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공포와 혼란이 초래되면서, 살아 숨쉬는 세계에 즐겁게 반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해로운 조수의 흐름이 내 사고과정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보다 상세하게 말하자면 즐거움 대신에-눈부신 천재의 값비싼 전시관에 들렀는데도-실제적인 고통과는 다르지만, 하여튼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가까운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포착하기 힘든 면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현상을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21-22)

 

나에게 그 고통은 익사 혹은 질식할 때의 느낌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이미지마저도 그 고통을 정확하게 포착했다고 할 수는 없다. 윌리엄 제임스는 수년 동안 우울증과 씨름했었는데, 그마저도 이 병에 대한 적확한 묘사를 포기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그는 우울증을 묘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암시한 바 있다. "이것은 실체적이고 실제적인 고통이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정신적인 신경 증세의 일종이다." (p.22)

 

그 돈을 잃어버리려고 '의도'했던 것일까? 최근 들어 나는 그 상을 탈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생각에 자주 시달렸다. 나는 잠재의식이 영향을 끼친 어떤 사건들이 현실로 재현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이처럼 멍청하게 수표를 잃어버린 것은, 사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혐오(우울증의 으뜸가는 증상)로 인해 수표를 거부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상을 수상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심적 주장에 설득당해 수표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과거 몇 년간의 어떤 공로를 보아도, 상을 받거나 인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자기 모욕을 받아들이면서. (p.24)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지적 선언은 <시지프의 신화>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장이다.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주제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p.28-29)

 

자살한 사람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거의 언제나 몹시 서둘러 진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암묵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좀더 주의하여 달리 행동했더라면 자살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실제로 자신을 죽였거나 미수로 그쳤거나 혹은 단지 위협하려고 시도했든지 간에-은 부당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부정함으로써 비행을 저지른 범죄자처럼 되어버린다. (p.38)

 

우울증이 많은 경우 자살로 마감되는 것은 그 고통을 더이상 참을 수 없기 떄문이다. 이 고통의 본질에 관한 전반적인 인식이 있어야만 이로 인한 무수히 많은 또다른 자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많은 경우 의학적인 치료나 입원을 통해-대다수 사람들은 우울증을 극복한다. 이들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p.41)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우울증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무엇이 내 우울증을 '야기'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비정상적이고 불가사의한 화학 작용과 행동과 유전적인 요인들이 너무 복잡하게 서로 꼬여 있기 때문에 원인을 아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바로 그렇기 떄문에 자살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 데에 직접적인 한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p.47-48)

 

알려진 것처럼 술은 심각한 우울증 유발 물질이다. 그럼에도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 술은 한 번도 말 그대로의 우울증을 나에게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안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했다.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적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패막이 노릇을 했던 동맹군인 술이 갑자기 증발해 버리자, 악의 사신이 무리지어 잠재의식으로 몰려오는 것을 막아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다. (p.53)

 

심각한 상태의 우울증은 광기일 수 있다. 광기는 상궤에서 벗어난 생화학 작용에서 기인한다. 광기가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화학적인 변화가 생겨 발생한다는 이론은 상당히 확실한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싱경계 스트레스로 인해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과 같은 화학물질은 고갈되며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의 분비는 증대된다는 것이다. 뇌조직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혼란을 일으켜 과잉 분비와 고갈 상태가 되풀이되면 정신은 고통받고 상처입었다고 느끼게 되며, 그렇게 흐려진 사고 과정은 신체 조직에 스트레스를 주어 발작을 유발하게 된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처럼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정신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되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울증의 광기는 폭력의 안티테제이다. 그것이 폭풍우임은 분명하지만 음울한 폭풍우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반응이 느려지고, 거의 마비 상태가 되어 정신적인 에너지가 제로 상태로 감소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로 체력이 약화되고 고갈된다. (p.57-58)

 

정신약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은 신경안정제인 벤조디아제핀 계 약물이 침울한 기분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심각한 우울증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데, 할시온도 그중 하나였다. (발륨과 아티반 역시 이에 해당한다.) (p.59)

 

내가 처했던 심각한 단계에서 심리치료의 유용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p.64)

 

적어도 한 가지 심리적인 요소만큼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고하다. 바로 상실감이다. 모든 형태의 상실감은 우울증의 시금석이다. 이 병이 진행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 또 퇴행하여 나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매 단계 상실감을 경험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감의 상실 역시 이미 알려진 증상이다. 나는 자부심과 더불어 자아 감각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런 상실감은 재빨리 의존성으로 퇴행했으며, 의존성에서 유아 시절의 공포로 퇴행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자기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방기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한순간이라도 집 안에 나 홀로 남게 된다는 생각은 나에게 격렬한 공포를 안겨줬다. (p.68-69)

 

우울증에는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한 신념, 혹은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가혹하다. 이처럼 가혹한 상황을 더욱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은, 손쉬운 치유책이 가까운 장래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름아닌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일상생활에서의 의사결정은 성가신 상황에서 덜 성가신 상황으로-불편한 상태에서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혹은 권태에서 활동으로-이동하도록 이루어지지만, 이 병의 경우에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동한다. (p.75-76)

 

중증의 우울증 상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제2의 자아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2의 자아는 일종의 유령 같은 관찰자로서, 본래 자아가 경험하는 치매 상태가 전혀 없는 냉정한 호기심을 갖고, 그가 다가오는 재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혹은 어떻게 무너지고 마는지를 관찰한다.

이 모든 행위에는 연극적인 요소가 있다. (p.78)

 

나에게 진짜 치료사는 격리와 시간이었다. (p.84)

 

폭풍우를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광포한 폭풍우는 거의 언제나 약화되면서 사라진다. 원인 모르게 찾아들었던 것처럼 원인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 모든 고통의 경로를 완전히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침내 평화가 찾아든다. (p.88-89) 

 

이와 같은 혼란이나 슬픔-사춘기나 그 이전에 경험한 부모, 특히 어머니의 죽음과 부재로 인한-은 우울증에 관한 문헌에서 외상으로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때로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정서적인 황폐화를 초래한다. 특히 어린아이가 '불충분한 애도(Incomplete Mourning)' 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받게 될 때 위험은 커진다. 실제로 불충분한 애도는 슬픔을 해소시키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까지도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남게 된다. 분노와 죄의식은 슬픔의 둑을 막아놓을 뿐만 아니라 자기 파괴의 일부이자 잠재적인 씨앗이 된다.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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